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시시가타니 음모 뒤의 정세 ===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으로 다카쿠라 천황에 대한 퇴위 공작도 엔랴쿠지 공격도 모두 무산되었다. 실의에 빠진 고시라카와인에게 더욱 충격을 준 사건이 타이라노 시게코의 1주기를 맞아 거행하려는 법화팔강을 둘러싼 분규였다. 다카쿠라 천황은 간닌(閑院)을 사토노다이리(里内裏)로서 쓰고 있다가 키요모리의 의향에 따라서 하치조도노(八条殿)로 행행했다. 고시라카와인은 간닌에서 법화팔강(法華八講)을 행할 것을 명령했으나, 가네자네의 저택을 찾은 히노 가네미쓰(日野兼光)는 >“함부로 간닌에 돌아오면 키요모리가 내심 어떻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치조도노에서 거행한들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시라카와인을 설득하여 결정이 연장되었다(《교쿠요》 안겐 3년 6월 21일조). 고시라카와인은 아내의 명복을 비는 불사(仏事) 장소만이라도 자유롭게 결정하고 싶어했다. 고시라카와인의 정치력 저하에 반비례해서 17세가 된 다카쿠라 천황은 정치적으로 자립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시라카와인이 전혀 정무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약해졌다고 해도 인세이는 여전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잠시 [[니조 덴노]]때와 같은 이두정치로 변모했다. 지쇼 2년(1178년) 정월, 고시라카와인은 온죠지(園城寺)에서 곤노쇼조(権僧正, 권승정) 구겐(公顕)으로부터 전법관정(伝法灌頂)을 받으려고 했지만 관정에 대한 상으로 온죠지에 가이단(戒壇)이 세워질 것을 두려워한 엔랴쿠지가 말사 소엔의 병사들을 동원해 봉기했고, 온죠지를 전소시킬 태세를 보였다(《교쿠요》, 《잔카이기》 정월 20일조). 고시라카와인은 승강을 보내 엔랴쿠지를 꾸짖는 동시에 타이라노 무네모리를 후쿠하라에 보내 키요모리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고시라카와인은 온죠지 행행과 관정을 모두 단념해야 했다(《잔카이기》 정월 25일조, 《햐쿠렌쇼》2월 1일조, 《교쿠요》 2월 5일조). 이 사건으로 헤이케에 큰 한을 품게 된 고시라카와인은 5월에 보복조치로 최승강(最勝講) 법회에서 엔랴쿠지 승려들의 공청을 정지시켜 버렸다(《교쿠요》《잔카이기》 5월 16일조). 엔랴쿠지와의 충돌을 바라지 않았던 다카쿠라 천황이 몇 번이나 중재에 나섰지만, 고시라카와인은 ‘관정을 막은 죄’라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인세이와 친정의 병립은 힘들게 되었고, 이두정치는 이미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대의 ‘치천(治天)의 군(君)’은 어린 천황을 옹립하고 이중권력의 형태이면서도 이중권력을 회피하고 있었지만, 헤이케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다카쿠라 천황을 퇴위시키는 것은 고시라카와인에게는 불가능했다. 헤이케의 의도는 다카쿠라 천황의 친정을 신속하게 이행하도록 하여 고시라카와인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월 24일에 타이라노 도키타다가 다카쿠라 천황에게 중궁 타이라노 도쿠코의 회임 소식을 전했다(《잔카이기》 동일조).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던 다카쿠라 천황에게 황자가 태어난다는 것은 희소식과도 같았고, 조정은 출산을 위한 기도에 전념했다. 고시라카와인도 도쿠코를 양딸로 삼고 있었기에 헤이케에 대한 감정을 일단 접고, 안산기원(安産祈願)에 참가했다. 11월 12일에 다카쿠라 천황의 제1황자가 무사히 태어났고 키요모리로부터 그 황자를 황태자로 삼자는 요청이 들어오는 가운데 고시라카와인은 구조 가네자네에게 연내로 태자를 세우는 것이 옳은지를 자문했는데, 가네자네는 >“2세, 3세로 태자로 세워진 예는 좋지 않고, 4세까지 기다리자면 너무 늦습니다.” 라고 아뢰었지만 연내에 황태자 책봉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교쿠요》11월 28일조). 12월 9일에 '친왕선하'가 내려져 ‘[[안토쿠 덴노|토키히토]]'(言仁)라는 이름이 주어지고, 15일에 황태자로 세워졌는데 그 의식은 로쿠하라에서 거행되었으며, 춘궁방(春宮坊)은 모두 헤이케 일문이었다. 황태자 주변에서 배제된 꼴이었던 고시라카와인은 다시 헤이케에 대한 불만과 경계심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지쇼 3년(1179년) 3월까지 고시라카와인이 이쓰쿠시마의 무녀 다이시의 춤을 보기 위해 키요모리의 니시하치조 저택(西八条邸)을 찾아, 다음날에도 인노고쇼, 시치조도노(七条殿)에서 함께 춤을 관람하는 등 양자의 교류는 가까스로 유지되었다(《잔카이기》 3월 17일, 18일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